미국에서 첫 대륙횡단 철도(The First Transcontinental Railroad)는 1863년부터 1869년에 걸쳐 건설된, 네브라스카주 오마하(Omaha)와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Sacramento)사이에 건설된 1800마일 길이의 철도이다.
건설공사는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 Railroad of California)회사가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으로, 유니온 패시픽(Union Pacific Railroad)회사가 오마하에서 서쪽으로 시공했다.
이 구간만 건설하면, 오마하에서 시카고를 거쳐 뉴욕까지는 이미 철도가 놓여 있어서 대륙횡단(Overland Rout) 철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 대륙횡단 철도의 필요성
캘리포니아주 주도 새크라멘토(Sacramento) 인근 강에서 1848년 1월 금덩어리가 발견됨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그해에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등지에서 왔다. 미국 동부에서는 교통사정으로 다음해(1849년)에 몰려왔다. 이때 온 사람이 무척 많아 49년에 온 사람들을 49er(포티나이너)라고 했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 풋볼팀 이름 등으로 쓰인다.
당시에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오려면, 세가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번째, 뉴욕에서 배를 타고 남미대륙 끝 Cape Horn을 돌아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길.
두번째, 뉴욕에서 배로 파나마 지협까지 와서, 카누와 나귀를 타며 1주일 여정의 지협횡단을 한 다음 태평양 해안에서 배를 기다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길.
세번째, 마차를 타고 육로로 오는 길로 반드시 봄에 출발해서 눈 내리기 전 가을에 도착해야한다.
어느 길을 택하든 4~6개월이 걸리고, 배의 난파, 열대병, 해적의 습격, 식수나 식량의 모자람 등으로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골드러시로 인해 캘리포니아 인구는 급격히 불어나 1850년에 31번째 주로 승격되었는데도, 교통이 불편하여 동부와는 교류가 힘들고 개발도 더디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던 시대라, 유일한 현대적 교통수단인 철도건설에 정부에서도 고심을 많이 했다.
□ 철도노선
노선 선정을 놓고 의회에서 논란이 많았다. 남부 주 출신의원들은 텍사스와 아리조나 남부를 거치는 남쪽 노선을 주장했고, 북부 주 출신의원들은 유타주를 경유하는 중부 노선을 주장했다. 몬타나주를 경유하는 북부 노선도 제기되었는데, 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실효성 문제가 있어 설득력이 떨어졌다.
결국 남북전쟁으로 남부 출신 의원들이 없을때 중부노선이 결정되었다.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중인 1862년 6월에 태평양철도법(Pacific Railroad Act)이 통과되었고, 7월1일 링컨대통령이 서명하였다.
두 철도회사,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 Railroad of California)과 유니온 퍼시픽(Union Pacific Railroad)이 선정되었고, 공사지급금으로 마일당, 평지는 16,000불, 고지는 32,000불, 산악지역은 48,000불씩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또 건설된 철도변 땅을 팔아 공사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두 회사는 철도를 많이 깔수록 비례해서 지급금과 땅을 받을수 있어 경쟁이 붙었다.
□ 공사시작
유니온 퍼시픽 회사는 네브라스카주 오마하(Omaha)에서 시작하여 와이오밍주 샤이엔(Cheyenne)을 경우하여 유타주로 이어지는 철도공사를 1863년 12월 2일 착공했다.
센트럴 퍼시픽 회사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시작하여,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a Nevada Mts.)을 통과하고, 네바다주 리노(Reno), 엘코(Elko)를 경유하여 유타주로 이어지는 철도공사를 1863년 1월 8일 착공하였다.
□ 유니온회사(Union Pacific Railroad) 공사진행
유니온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오마하는 농업과 목축을 위주로 한 인구 3천명의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1863년이 되자 갑자기 미국의 철도건설 중심지가 되어 번잡한 도시가 되었다.
큰 공장들이 세워져 큰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주위에서 또는 미조우리강 상류에서 베어진 나무가 실려내려오면, 다듬어져 철도 침목을 생산했고, 철도 레일은 펜실바니아에서 실어왔으며, 철도 차량은 시카고에서 왔다.
철도는 단선으로 건설되었고, 15마일마다 교차용 역이 세워졌다. 이들 역에는 기차 연료가 될 나무나 석탄이 준비되었고, 우물을 파서 스팀펌프로 물을 퍼올렸다. 처음엔 대부분 평야지대여서 공사는 순조로웠다.
건설인부들을 주로 아일랜드계 이민자와 남북전쟁의 퇴역군인들을 썼다. 건설현장에는 임시천막촌이 형성되었다. 공사 인부 숙소는 물론이고, 사무실, 식당, 호텔, 은행, 교회, 성당 등 하나의 완전한 타운이 형성되는 것이다. 어느정도 철로부설이 진행되면, 그리고 적당한 평지가 있으면, 이 타운시설은 기차로 이동하여 건설현장 가까운 곳에 다시 세운다. 그리고 이 임시 타운 20마일 뒷쪽에는 술집과 도박장이 따라오면서 자리잡고 영업한다.
공사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 인부들에 대한 보급품은, 건설되는 철도를 통해 운반되었다. 주변에 많이 있는 들소를 잡아 인부들의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했다.
그런데 원주민(Indian, Native American)들은 자기네 땅에 자꾸 침범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싫었다. 또 자기네 사냥감인 들소가 자꾸 없어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건설인부 중에는 남부군 또는 북군에서 제대하거나 도망친 사람들이 많아서 총을 휴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주민이 적의를 갖고 대하면 그들은 총을 사용했다. 결국 싸움이 일어날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정부에서는 신설되는 철로변 군데군데에 요새를 만들고 수비군을 주둔시켰다. 1864년 65년 사이 겨울에는 General Dodge와 사병 276명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도 있다. 철도공사가 끝난 후 W.M.Stewart 상원의원이 의회에 낸 보고서에는 철도공사 중 사고와 전투를 합쳐 2만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했다.
□ 센트럴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 공사진행
센트럴은 처음에 새크라멘토에서 시작할때는 평지여서 공사가 순조로웠으나, 곧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통과해야 하는 지형에 이르러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철도는 해발 7200피트까지 고도가 높아지기도 했고 터널공사도 했다.
공사인부는 중국인들을 썼는데, 처음에는 체구가 작아 철도건설같은 일을 할수 있을까 하고 망설였는데, 며칠만 시켜보기로 한 결과, 일을 잘해서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골드러시때 온 중국인들, 세탁소나 부엌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무제한 고용하기로 했다. 그래도 모자라 홍콩에서 직접 모집해서 운송해왔는데 만5천명 규모였다. 이래서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에 미국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계기가 되었다.
낮은 급료에도 중국인들은 성실하게 일을 잘했다. 그들은 싸우지 않았고, 큰 소리로 다투었으나 악의는 없었다고 한다. 특히 터널 굴착공사 등 힘든 일을 할때는 소위 십장(작업반장)의 말에 따라 젊은 사람이 더 투입된다든지 하는, 자율성과 연장자 우대정신이 있어 공사운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에는 차를 끓여마셨는데, 이것이 풍토병에 안 걸리는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공사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는 동부에서 배에 실어 남미대륙 남단 Cape Horn을 돌아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샌프란시코에서 뉴욕이 직선거리 3천마일이지만, 배로는 만5천마일이고 4개월이상 걸렸다. 파나마 지협을 거쳐올 경우는 시간이 조금 단축될수 있으나, 비용은 더 들었다. 기차를 수송해 오는데, 그냥 배로만 오면 2300불이지만, 파나마를 통해 오면 8000불이 든다. 유니온측의 골치거리였던 원주민들과는 잘 타협을 해서 별 마찰이 없었다.
□ 횡단 철도의 준공
공사시작 6년 5개월후 양쪽 회사 건설자들은 유타주의 Promontory Summit에서 만났다. 유니온은 1087마일(1749km)의 공사를 했고, 센트럴은 690마일(1110km, 산악과 사막이 대부분)의 공사를 수행했다.
1869년 5월 10일 마지막 스파이크(Golden Spike)를 박음으로써 양쪽에서 깔아온 철도가 이어졌다. 동시에 철도와 같이 철로변에 설치한 전신라인으로 이 소식이 전 미국에 해냈다( DONE )라고 타전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동시에 처음 대륙을 횡단한 것이다.
이때까지는 워싱턴에서 대통령이 연설한 내용이 캘리포니아주에 알려지려면 열흘 이상 소요되었다. 미 전국 국민이 이 소식을 듣고 축하했다.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가려면 6개월 걸리던게 일주일로 단축되게 되었으니 충분히 축하할 일이다. 처음에 공사예상 기간은 14년으로 잡았으나, 7년도 채 안 걸려 완성했다.
센트럴은 같은해(1869년) 11월에 철도를 샌프란시스코 만(San Francisco Bay)의 오클랜드(Oakland)까지 연장하였다.
유니온은 미조우리강 위에 다리를 1872년 완성하여 기존 동부쪽 철도와 연결시켰다. 사실은 이때가 미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차츰 더 빠른 횡단이 필요해서 7년후인 1876년에는 급행열차 Transcontinental Express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83시간 39분에 주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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